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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1968 년 노벨이 유언에서 언급하지 않은 새로운 노벨상을 추가되었다. 바로 스웨덴 중앙은행이 은행설립 300주년 기념사업으로 신설한 노벨경제학상이다. 노벨경제학상은 상의 명칭이나 상금을 제공하는 주체가 다르다. 다른 상들은 모두 Nobel Prize로 시작된다. 반면 노벨경제학상은 "알프레드 노벨을 기리는 스웨덴 은행의 경제학상"(The Bank of Sweden Prize in Economic Sciences in Memory of Alfred Nobel)이라고 긴 명칭을 가진다. 다른 노벨상은 상금이 노벨 재단으로부터 나오지만 경제학상만은 스웨덴 은행이 직접 부담한다. 노벨 가(家) 사람들 중 일부는 노벨경제학상이라는 명칭을 빼주기를 요구하고 있다. 노벨의 유언과는 직접적 관련도 적으며 노벨이 생존시에도 경제나 경영을 싫어했고 부유한 사업가가 아니라 과학자, 발명가로 인식되길 희망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노 벨경제학상은 출신 배경만 빼고는 다른 노벨상과 동일하다. 기여한 바의 독창성, 과학과 실용상의 중요성과 영향도가 주요 선발 기준이다. 특히 2005년 노벨경제학상 선정위원장이었던 아사 린드벡(Assar Lindbeck)도 지적했듯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뉴턴의 명언이 그대로 적용된다. 즉, 후학들이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 있도록 얼마나 견고하고 높은 어깨를 새로이 만들어 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물론 경제학이 사회과학인 만큼 경제학자가 공공정책을 포함한 사회 전체에 미친 영향도 어느 정도 고려한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경제학을 넘어서는 하이에크의 영향력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역 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중 정치나 사회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 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을 꼽는다면 하이에크(Hayek, Friedrich August von, 1899~1992)를 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정치 지도자들이 그의 신념을 따르고 있다. 처칠, 대처, 레이건, 부시가 가장 대표적이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이 1970년대 후반 전당대회에서 당 노선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을 때의 일이다. 대처는 자신의 가방에서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을 꺼내어 모두 볼 수 있도록 높이 들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바이다”라고 테이블을 힘차게 쳤다고 한다. 하이에크의 영향력은 경제학자와 정치가를 넘어선다.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 톰 피터스나 피터 드러커는 하이에크를 이 세기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이자 사회철학자로 부르고 있다. 무엇이 하이에크를 이런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했을까? 노벨상 선정위원회는 1974년 하이에크의 노벨상 수상 이유를 “화폐와 경기변동 이론에 대한 선도적 연구와 경제, 사회, 제도적 현상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깊은 분석”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노벨상 수상강연에서 밝혔듯이 하이에크가 제안하였고 그의 추종자들이 열렬히 추종했던 명제는 의외로 단순하다. “인간은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듯이 성장을 일구어내는데 필요한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는데 만족해야한다. 장인이 물건을 만들듯이 결과를 직접 다듬을 수 없다.” 즉, 제한된 지식을 가진 인간들로 모여진 인류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제한된 지식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하이에크의 知的 勇氣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이상의 하이에크의 명제는 현대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 단순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하이에크가 이러한 명제를 제안하고 이를 발전시켜나간 시기의 인류의 상황을 보면 하이에크의 지적 용기와 인내를 읽어낼 수 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1944 년 ‘노예의 길’이 출판된 후 하이에크는 그의 도발적 주장으로 말미암아 국제적 인물로 부상한다. 그러나 하이에크 그 자신은 거의 학문적 사망선고를 받는 상황으로 몰리고 만다. 하이에크 스스로 “나의 주장이 지나치게 멀리 나아갔기 때문에 나는 전문가로서의 신망을 완전히 잃을 정도였다”라고 회고하였다. 그의 동료들은 이 책을 하이에크가 살고 있던 영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에 세워지고 있던 복지국가에 대한 위험스럽고 구시대적인 공격으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책이 출간된 이후에도 20~30년간 이러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1950~60년대 동안 구 소련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정부의 덩치를 키워가던 유럽 각국들 역시 번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7년 에릭 홉스바움은 하이에크를 ‘광야의 예언자’라고 무시하였고 영국 철학자인 안토니 퀸톤은 그를 ‘위대한 공룡’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그의 추종자였던 처칠은 이를 일찌감치 예견한 듯 했다. 1945년 하이에크의 책을 직접 거명하며 선거를 치르고 있던 윈스턴 처칠도 하이에크와 만난 자리에서 단 한마디만을 남겼다. “당신의 말은 전적으로 맞다; 그러나 영국에서 결코 그런 일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하 이에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이론을 더욱 다듬어갔다. 하지만 이어지는 저작 역시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이는 경제학자로서의 신망도 잃게 만들었다. 어느 대학도 그를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영국을 떠나게 되었고 이후 미국의 몇몇 대학을 전전하다 마침내 1950년 시카고 대학에서 자리를 잡았다. 아쉽게도 그에게 자리를 준 곳은 경제학과가 아니었다. 밀턴 프리드만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로서는 하이에크가 실제로 어떤 경제학도 하지 않고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노벨상에는 능력과 용기가 필요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어 려움이 극해 달하고 있을 때 노벨상이 의외로 찾아왔다. 당시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는 정부개입주의자이자 스웨덴식 사회주의의 주창자인 군나르 미르달에게 상을 수여하려 했지만 편향된 선택임을 불식하기 위해 보수주의자로서 하이에크를 공동 수상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하이에크를 포함한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볼 때 하이에크의 노벨상 수상은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경제학계나 정치 사회 환경은 70년대 중반부터 빠르게 바뀌어 갔다. 1974년 오일쇼크 이후 유럽 각국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무비판적 정부 개입은 스태그플레이션을 낳았다. 경제학자들은 정부개입의 한계와 시장의 중요성을 재발견하였다. 레이건과 대처와 같은 자유세계의 정치지도자, 그리고 동부유럽, 구소련 그리고 중국 등의 반체제 인사들 역시 하이에크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이에크가 일찍부터 예견했던 소련의 붕괴가 이어졌다. 밀턴 프리드먼은 “내 생각으로 이 사이클에서 아담 스미스의 역할을 한 것은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이다”라고 하이에크와 서구 사회가 걸어갔던 길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하 이에크의 생애는 사회과학자와 노벨상 수상자가 걸어가는 길을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론은 찬사보다는 적지 않은 시련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하이에크의 지적대로 새로운 것이 유용함을 입증할 임무는 그것을 주창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지 기존 사회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에게는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그것을 오랜 세월동안 가꾸고 지켜갈 수 있는 지적 용기가 요구된다. 이념적 편향과 상관없이 하이에크는 두 가지 모두를 갖춘 노벨상 수상자였다고 하겠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인간존중 5호 특집 '노벨상 가까이 다가서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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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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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시 카고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박사후(Postdoc)과정을 위해 머물었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은 노벨상이 주어지는 10월이 오면 학교가 술렁대기 시작한다. 2005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3인중 한 명인 로보트그럽스 교수를 포함하여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가 31명에 이르니, 해마다 이 대학 교수 중 누가 상을 받을 것인가는 큰 관심거리다. 내가 일했던 연구실의 보스이었으며 1992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였던 마커스 교수의 경우에도 ‘올해는 주어질 텐데, 안 주어지면 내년에는 주어지겠지’ 하면서 관심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방인이었던 나조차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머무르는 동안은 노벨상 수상자 발표 시기 때만 되면 덩달아 흥분되면서 묘한 기분에 싸였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노 벨화학상의 시작은 화학의 정통 분야인 유기화학이 아니고 물리화학 분야에 주어졌다. 즉 노벨화학상은 물리화학이라는 신학문의 태동과 때를 같이 했고, 그 이후 노벨화학상 수상자들의 면면이 바로 화학분야의 발전사와 그 궤를 같이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TEXT-DECORATION: underline">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의 구조, 천재적인 방법으로 파악하는 화학자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화학자들은 비이커에 시약들을 섞고 끓이지만, 이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개개의 분자를 쪼개어 이리저리 붙여 새로운 분자를 만드는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의 구조를<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TEXT-DECORATION: underline"> <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여 러 천재적인 방법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광학의 발전은 분자하나를 직접 관찰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분광학분야의 불후의 명저들을 남기고 그로인해 노벨상을 받은 헤르츠버그 외 분광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또 다른 과학자로 멀리켄이 있다. 그는 분광학 실험을 설명하기 위해 분자궤도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그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혹자는 아이디어 하나로 노벨상을 탔다고 콜럼버스의 달걀에 비유하며 그의 업적을 비하하기도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감히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가 없다. 초창기 분자분광학이라는 분야 발전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엄청났고 그런 토대 위에서 분자궤도 개념은 탄생을 했던 것이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시카고 대학은 분자궤도함수론의 메카가 되어 수많은 젊은 과학자들이 꿈을 안고 모여들었던 것이다. 20세기 초 발전한 양자역학은 화학자들로 하여금 분자의 성질을 계산할 수 있도록 하였고 멀리켄의 반정량적인 아이디어는 한편으로는 분자 반응에 적용이 되어 후쿠이와 호프만의 노벨상 수상을 가져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산화학이라는 학문으로 발전을 하게 되어 콘과 파플의 수상을 가져왔다. 분광학은 더욱 발전하여 1999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즈웨일 등에 의해 발전된 펨토초 분광학은 분자 내에서 실시간으로 에너지, 전자, 원자들의 운동을 볼 수 있게 하고,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뷔트리크 등에 의해 거대분자들의 분자량과 구조들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노벨화학상은 물리가 화학에 끼친 영향과 그로 인한 화학의 거대한 발전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놀라운 통찰력과 겸손함 그리고 조국을 잊지 않은 유안 리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노 벨화학상을 수상한 과학자 중 1986년 분자살 충돌실험으로 수상자가 된 유안 리를 통해 인류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위대한 과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느낀 바 있다. 대만 토박이였던 유안 리는 버클리 대학에서 대만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미국에서는 나 한 사람 더 있고 없고가 큰 차이가 없으나 대만에서는 매우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의 연구생활이 희생되더라도 대만으로 가겠다”고 자신의 대만행을 설명했다. 그로 인해 지금은 분자충돌실험 분야에 있어 대만이 메카가 되어, 전 세계에서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필히 한 번 가야하는 곳으로 되어 있다. 타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이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의 겸손함과 애국심(?)은 나에게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내 지도교수였던 파노 교수는 유안 리를 너무 좋아해, 때때로 그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부인이 시카고는 너무 추워 대만으로 가자고 졸라 절충으로 버클리 대학으로 옮긴 일, ‘실험분야에서의 모차르트’로 불리던 그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어떤 실험도 설계를 할 수 있다, 그런 그도 헬륨 간 충돌에서 양자 간섭현상을 볼 수 있는 실험을 할 수 없냐고 하니 현재론 불가능하다고 한 일, 그의 학생들의 학위논문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볼 기회가 있었는데 지도교수인 그의 놀라운 통찰력에 경의감을 감출 수 없었다, 등등. 」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평생을 받쳐도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연구해야 한다던 폴링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노 벨상을 받은 화학자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꼽히는 폴링의 일화도 과학도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화학분야에 기여한 업적은 그가 서거한 해, 미국화학회에서는 평상시 폴링이 주장하던 ‘일생을 바쳐 연구할만한 성배(holy grail)’에 해당하는 화학연구들에 대해 1년간 ‘Accounts of Chemical Research’에 연재한 것만으로도 족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폴링 교수는 대학원생들에게 “깊은 산속에서 가로, 세로, 높이가 30 cm인 금덩이를 발견했을 때 당신 같으면 그 금덩이를 버리고 가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길 좋아했다. 문제는 금덩이의 무게가 무려 700 kg이 넘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이러했다. “아마 여러분 같으면 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가지고 가려고 할 것이다. 연구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연구는 평생을 받쳐 하기엔 불가능할지 모르더라도 대학원생들은 이런 연구를 해야 한다.” 대학원생들은 큰 꿈을 가져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많은 학생들을 감동시켜 훌륭한 화학자를 배출시킨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위대한 업적만큼이나 따뜻했던 마커스와 파노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앞 에서 적은 1992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이며 한 때 나의 보스였던 마커스 교수에 대한 추억은 위대한 과학자의 체취로 나에게 소중이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데, 한 세기에 한 명 정도 나올 최고의 이론화학자인 마커스 교수는 이론과 실험의 큰 괴리감을 갈파하곤 했다. “아무리 어려운 것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화학자들은 실험값과 크기를 비슷하게 계산할 수만 있으면 샴페인을 터트린다” 이 말은 이론 화학자로서 훌륭한 업적을 쌓고 있는 마커스 교수이기에 할 수 있는 그 다운 말로, 이를 떠올릴 때면 그와 나와의 크나큰 차이를 느끼며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 학문적으로 높은 경지에 있던 마커스 교수는 마음이 무척 좋았다. 하지만 간혹 자신도 모르게 학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상처를 받은 학생은 그의 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 았고, 그의 부인은 마커스 교수를 대신하여 학생을 위로해주는 뒤치다꺼리 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나 의 지도교수인 파노 교수도 Fano effect, Beutler-Fano profile, Fano-Lichten diagram, Lu-Fano plot, Fano factor 등 그의 이름이 들어 있는 정리가 매우 많은 훌륭한 과학자였다. 한국에 귀국하여 파노 교수에게 편지를 쓰니 반갑게 답장하면서, 일본인 선배를 거론하며 일본도 연구풍토가 자리 잡히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고 걱정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런 연구풍토에 대해 간혹 이야기를 한다. “연구생활은 단순한 생활이다. 아침에 연구소에 들어서면 누군가 벌써 끓여 놓은 커피의 진한 향이 뇌를 자극한다. 어디선가 열띤 연구이야기가 들리고 연구에 지친 입에서는 냄새가 풀풀 난다.” 그 때는 그런 입 냄새가 정말 싫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입 냄새가 정말 그립다. 누군가 다가와 묻는다면 금상첨화다. What's new?라고. <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rgb(0,0,0); LINE-HEIGHT: 16pt;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 아주대학교 종합정보지 '인간존중' 5호 <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특집 '노벨상 가까이 다가서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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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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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스나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화제이면서도 그 내용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지난해 말 논란이 되었던 줄기세포나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노벨상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을 보면 최근 문제를 일으킨 우리나라 배아줄기세포 연구자가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도록 정치인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고 한다. 만약 추진위원회를 만든 사람들이 노벨상과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면 이런 해프닝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노벨과 노벨상, 노벨상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20여개국 94개사 거느린 최초의 다국적 기업의 총수 알프레드 노벨 노 벨에 의해 노벨상이 만들어졌다는 것,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제외하고 노벨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1896년 노벨이 사망하고 1901년 최초로 노벨상이 수여되기까지의 우여곡절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노 벨은 183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당시 스웨덴은 지금의 노르웨이를 지배하고 있던 북구의 강대국이었다 - 이 때문에 노벨상 중 평화상만은 지금도 노르웨이에서 수여하고 있다. 노벨 가문은 많은 유명한 기술자를 배출한 가문이었고 노벨의 아버지 역시 기술자였다. 러시아에 이주하여 무기를 생산하여 부자가 된 아버지의 덕택으로 노벨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노벨을 학교에 보내는 대신 우수한 가정교사로 고용하여 노벨에게 과학, 언어, 예술, 철학 등 수준 높은 가정교육을 시켰다. 이 덕분에 노벨은 스웨덴어 이외에 5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었다. 또 1850년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 머물며 화학교수 펄루즈로부터 1년간 화학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때 운명적인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액체폭약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니트로글리세린은 매우 불안정하여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폭발하기 때문에 당시 아무도 이를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1850 년 러시아가 크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아버지의 무기 공장이 파산을 하게 되었다. 이에 아버지 대신 노벨의 세 형제가 회사를 일으키기 위해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한 안전한 폭약의 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우선 니트로글리세린을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발견하였고 많은 실험을 거쳐 니트로글리세린과 폭발력이 약한 기존의 흑색화학을 섞은 후 뇌관을 달아 터뜨리면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폭약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발명에 대한 특허권도 얻고 폭약을 만들어 돈을 벌게 된 노벨은 스웨덴으로 돌아가 폭약공장을 차렸다. 이후 사업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하여 스웨덴뿐만 아니라 독일, 미국 등에도 공장을 세워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866년 독일 공장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를 계기로 더 안전한 폭약을 개발하려고 노력하던 중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섞은 후 뇌관을 단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게 되었다. 다이너마이트는 이전 폭약보다 폭발력은 약하지만 매우 안전하였다. 또한 당시 전 세계적으로 철도, 도로, 터널, 다리 건설이 늘어나면서 다이너마이트에 대한 수요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노벨의 부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0년대 후반 노벨은 총 20여 개국에 94개의 회사를 가진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의 총수가 되었다. 노 벨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 죽었다. 그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싫어했으며 여가시간은 독일,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 있는 자신의 저택을 오가며 저택에 마련한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거나 독서를 하며 보냈으며 시나 소설을 쓰기도 했다. 만년에는 바쁜 사업일정, 유명인에 대한 호기심, 폭약 발명에 대한 세상의 따가운 시선 등으로 정신적 고통을 받았고 1895년 협심증 증세가 악화되자 노벨상 제정의 뜻을 담은 마지막 유언장을 작성해 스웨덴의 은행에 보관했다. 1896년 12월 10일 노벨은 이탈리아 산레모 저택에서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노벨의 최종 유언장의 노벨상 관련 부분) 나의 전 재산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처리할 것을 밝혀둔다. 원 금은 나의 집행인들에게 맡겨 안전한 곳에 투자해 기금을 조성하게 하고,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는 지난해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을 선정해 상을 주는 형태로 매년 지급하도록 한다. 앞서 언급한 이자는 5개 부문에서 공헌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하도록 한다. 첫째,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둘째 화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셋째 생리학이나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넷째 문학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이상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을 쓴 사람, 다섯째 국가간 우애를 돈독히 하거나 군대를 폐지 또는 축소시키거나 평화회담을 주창 또는 개최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을 주도록 한다. 물 리학상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생리의학상은 스웨덴 스톡홀름의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문학상은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평화상은 노르웨이 의회에서 선출된 5인위원회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상을 수여하는데 있어 어떠한 경우에도 후보자의 국적이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따라서 상은 스칸디나비아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수상할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어야 한다. 노벨의 유언에 따라 2000억원 기부로 노벨상 제정 노 벨이 사망한 후 노벨의 최종 유언장이 공개되자 그의 친척과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노벨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친척들은 대부분의 재산을 ‘지난 해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을 수여하도록 기부한다’라고 적힌 유언장의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노벨이 기증한 재산은 지금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여 2000억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친척은 자신들의 몫이 거의 없기 때문에, 스웨덴 정부는 상금이 외국인에게 지급된다는 사실 때문에 노벨의 유언에 불만이었고 소송이 잇달았지만 모든 소란이 가라앉은 1901년 12월 10일(노벨 사망일) 노벨이 소망한대로 최초의 국제적인 상인 제1회 노벨상이 수여되었다. 노 벨의 유언대로 처음에는 문학상, 평화상,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의 5개의 상이 수여되었고 1969년 스웨덴 국립은행 창립 300주년을 기념하여 경제학상이 신설되어 현재 모두 6개의 노벨상이 수여되고 있다. 각 상은 유언에 따라 각기 다른 기관의 노벨위원회에서 수상자를 선정하며 기금 및 시상식 관리 등은 노벨재단이 전담한다. 노 벨상 수상과 관련하여 우리가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이 바로 노벨상 수상자의 엄정한 선정과정이다. 우선 매해 9월부터 다음 해 수상자의 추천을 시작한다. 보통 3000명 이상의 저명 학자(이전 노벨상 수상자, 노벨상 수여기관의 회원, 전 세계 유명 대학 및 연구소의 교수, 학자나 연구원 등)에게 추천을 의뢰한다. 따라서 국제적인 인맥을 형성하지 못하면 후보자에 끼일 수조차 없다. 다음 해 1월 31일 후보자 추천이 완료되면 이때부터 노벨 위원회에서 추천 후보의 연구 업적, 중요성, 파급효과 등을 심사하게 된다. 이때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도움을 받는데 과학상의 경우 업적 자체도 중요하지만 업적의 파급효과와 학문에 미친 영향력을 매우 중요시한다. 연구 성과의 영향력이 낮다면 아무리 연구 성과가 좋아도 노벨상을 수상할 수가 없다. 각 노벨위원회에서는 심사를 완료해 9월 말까지 노벨상 수여기관에 보고하고 11월15일까지는 투표를 통하여 수상자를 결정해야 하며 결정이 끝나는 즉시 언론을 통해 발표를 한다. 노 벨상 시상 초기에는 주로 수상자가 한 명이었으나 차츰 수상자의 수가 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아도 분야별로 3명을 넘지 않도록 규정되어 있다. 3명 이상이 거의 같은 시기에 비슷한 업적을 남겼을 경우 나이순으로 3명을 선택한다. 비록 서양이지만 연장자에게 기회를 우선 제공하는 점이 흥미롭다. 매년 12월 10일에 열리는 시상식에서 노벨상 수상자에게는 상장(개인별로 달리 디자인)과 메달, 상금이 수여된다. 상금은 현재 분야별로 15억 원 정도이며 3명인 경우 수상자의 업적에 따라 각각 1/3씩, 또는 한 사람은 1/2, 다른 두 사람은 1/4씩으로 배분한다. 국가간의 자존심 경쟁이 된 노벨상의 현대적 의의 이 제 100여년의 역사를 지닌 노벨상은 명실상부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 노벨이 희망했던 대로 국적에 상관없이 과학, 문학, 세계 평화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을 선발함으로써 학문 발전과 인류 복지의 증진에 기여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노벨상 제정 초기에 노벨상은 노벨의 유언처럼 국가와는 관련이 없는 완전히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상의 권위가 커지면서 자국민이 그 해에 노벨상을 몇 개 수상했느냐를 놓고 국가 간의 자존심 경쟁이 치열해졌다. 마치 국가의 과학 수준이 노벨 과학상의 메달 수에 비례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노벨상을 탈 수 있는 분야를 국가가 지정하여 막대한 연구비, 인력을 지원하고 심사에 영향력을 미치려고 로비를 하는 등 부작용도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옆 나라 일본에서는 2001년 정부 주도로 향후 50년간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 30명 배출이라는 야심찬 과학기술 기본계획을 확정하고 정부 예산을 집중 투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행위이다. 구미의 선진국들이 과거 노벨 과학상을 독식하다시피 한 것은 과학문화가 정착되어 있고 과학을 전공하지 않지만 과학을 사랑하는 저변 인구가 많기 때문이지 결코 막대한 연구비의 지원이나 로비에 의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한 두 사람의 스타가 바람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바람이 지속되어 결과를 얻기까지는 여러 사람들의 동참과 오랜 동안 과학을 가꾸는 정성이 필요하다. 자기 분야에 열정을 가지고 노벨의 유언대로 인류에 공헌할 업적을 얻기 위해 노력할 때 노벨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커지며 그렇게 수상한 노벨상만이 노벨이 바라던 진정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아주대학교 종합정보지 인간존중 5호 특집 \'노벨상, 가까이 다가서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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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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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우 리의 삶에 대하여 미국의 대표적인 시인 휘트먼(Walt Whitman)은 그의 유명한 「나의 노래」(Song of Myself)라는 시의 한 구절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만나는 이들, 내가 사는 읍, 도시, 국가의 영향들, 최근에 유행하는 것들, 나의 저녁식사, 외모, 사랑하는 그녀가 내게 보인 무관심(진짜이든 환상이든), 전쟁, 살인. 이들은 매일 밤 매일 낮 내게로 다가온다 그리곤 다시 떠나간다. 그러나 이들은 <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나 자신<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이 아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 매일 매일의 삶은 내가 사는 사회, 마주치는 사건들, 만나는 사람들, 최근에 유행하는 것 등에 의하여 영향 받으며 형성되고 변형되고 지속되지만 휘트먼은 이렇게 형성된 자아는 진정한 “자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휘트먼은 또한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로 노래한다: “저기 가는 이 누구인가? 저 욕망하고, 야만스럽고, 신비롭고, 벌거벗은 이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욕망하는 존재”이고 우리의 삶은 직,간접적으로 마주치는 사람들, 사건들, 사회의 가치관들--이것을 정신분석철학자 쟈끄 라깡(Jacques Lacan)은 나 자신에게 크게 영향을 주는 타자라는 의미에서 “대타자(Other)”라 부른다--로부터 심하게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갖는 욕망의 많은 부분은 나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는 대타자의 욕망이다. 이런 점에서 라깡의 유명한 구절,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Men's desire is the Other's desire)"은 그 설득력을 더한다 하겠다. 이제 우리의 욕망이 진정한 우리의 욕망이 될 수 있을까?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이상적 아름다움에 도달하려는 욕망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이 에 답하기 위해서 우선 우리들의 욕망의 풍경 가운데 이 땅의 많은 이가 공유하고 있는 욕망, 즉, “아름답게/멋있게”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의 현주소를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자. K대학 영문과 4학년 김수현, 판타시 소설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바 있는 매우 똑똑한 학생이다. 키 165cm, 긴 머리, 약간 통통한 얼굴의 그녀는 1년 전부터 약간의 현기증과 무기력함을 느낄 만큼 심하게 다이어트 중이다. 하루에 두 끼만을 먹고 식사 때는 반 공기 이상의 밥을 절대 금하며 간식 또한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어깨까지 드리운 긴 머리가 항상 양 볼을 조금씩 가리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수현이 이렇게 노력하는 것은 보름달처럼 동그스름하고 통통한 자신의 얼굴이 좀 더 갸름해 보이고 조금 통통한 몸매가 날씬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다. 날씬한 몸매, 긴 생머리, 갸름하고 작은 얼굴을 가져야 데이트하고 싶은 남학생으로부터 관심을 받을 수 있으며 취직면접에서도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어쩌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 살이 1kg이라도 찌면 남이 뭐라 하기 전에 스스로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날씬한 몸매, 갸름하고 작은 얼굴, 긴 생머리의 젊은 여자”라는 “아름다운 여자”의 이미지가 매일 매일 수없이 반복해서 TV 드라마, 광고, 영화, 인터넷에 등장하여 대타자들(남자, 회사중역 등)의 눈과 감각을 깊이 물들이고 있는 오늘의 한국에서 이들로부터 “괜찮은”(desirable)" 여자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수현에겐 이러한 강력한 이미지에 저항할 힘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대타자의 욕망에 자신의 욕망을 맡기는 사람이 어찌 수현 뿐이겠는가? 미모의 얼굴을 가졌지만 더 예뻐지고 싶어--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쁘게 보이기를 요구하는 대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대타자의 욕망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하여 그 명령에 따라--수 십번 성형수술을 한 결과 얼굴이 기형처럼 변하게 된 ”선풍기 아줌마“를 우리 한국사회는 지금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비 단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상적 아름다움”의 화신으로 그 찬란한 빛을 발하며 많은 이들의 눈과 귀와 심장을 녹이는 “아름다운 여자”의 이미지는 할리우드영화에 등장하는 여자주인공들이다. 지금 세계의 많은 영화관에서 많은 관객들을 동원하고 있는 할리우드영화 '킹콩(King Kong)'에 나오는 여주인공 앤(Ann, Naomi Watts분)은 많은 미국인들이 암묵적으로 갖고 있는 이상적인 미인의 특성, 즉, 금발의 생머리, 푸른 눈, 날씬한 몸매를 가진 젊고 순수한 이미지의 백인 여자라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지닌 주인공 앤은 자신이 동경하던 감수성 있는 시나리오 작가 잭(Jack, Adrien Brody분)으로부터 헌신적인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은 물론 야수적 본능과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야만적인 정글의 왕 “킹콩”도 사랑에 빠지게 하여 그녀를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하게 된다--“Beauty killed him"--는 이 영화의 러브 스토리가 웅장한 스펙터클과 때론 가슴을 조이게 만드는 서스펜스와 더불어 관객의 마음을 휘어잡으면 잡을수록 ”표준적 미인“의 이데올로기는 더욱 더 강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미인 이미지는 영화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40대의 주인공 레스터(Lester, Kevin Spacy분)는 사회적 금기를 깨고 딸 제인 (Jane, Thora Birch분)의 친구 앤젤라(Angela, Mena Suvari분)에게 반하게 되는데 앤젤라 도 금발의 생머리와 푸른 눈 그리고 감각적 몸매를 가진 젊은 백인 여자라는 비슷한 이미지를 반복하고 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자신의 고유한 욕망에 귀 기울여야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젊 고, 날씬하고, 긴 생머리의 여자라는 이러한 미인의 이미지가 한국과 미국 모두의 대중매체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나오며 많은 이의 눈과 심장과 피를 물들이고 있다면 여기에는 그냥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이미지가 아니라 국경과 문화를 넘어 보편적으로 인간의 욕망에 뭔가 직접 어필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에 대하여 '아메리칸 뷰티'의 한 주요 인물, 휘트먼, 라깡은 부정적으로 답한다. '아메리칸 뷰티' 에 항상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는 10대 소년 리키(Ricky, Wes Bentley)는 모든 남자가 자기에게 반하게 된다는 생각을 가진 앤젤라에게 “넌 그저 평범할 뿐이야(You are just ordinary)"라고 선언하는 한편 많은 이들이 평범하게 보는 제인--자신의 가슴이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방확대수술을 하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을 정도로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지 않고 있다--과 바람에 흩날리는 비닐봉지의 움직임에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에게 아름다움과 진정한 욕망은 사회의 대타자에 의해 반복되는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를 넘어선 고유한 무엇인 것이다. 휘트먼에게도 진정한 ”나 자신“은 밖에서 학습/주입되어 형성된 자아가 아니라 외부의 영향을 거부하지는 않으나 그에 목메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자신이다. 라깡이 <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할 때 그가 강조하는 것은 대타자의 욕망에 우리는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대타자의 욕망은 나의 모든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결여된 욕망이므로 이에 자신을 맡기기 보다는 자신의 고유한 욕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영화, 광고, 드라마 등 강력한 대중매체가 보여주는 화려한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면서 우리가 이런 이미지를 강박적으로 전면 거부할 필요는 없지만, 이러한 대타자의 달콤한 명령에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과 욕망을 내맡기기 보다는, 이들을 아름다움의 한 형태로 보면서 우리 자신과 이웃이 갖고 있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찾고 이를 기뻐할 때 2006년이 멋진 한 해가 되지 않을까?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2pt; COLOR: rgb(0,0,0); LINE-HEIGHT: 19.2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아주대학교 종합정보지 '인간존중' 5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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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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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가슴으로 낳은 딸 잘 키워야죠”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12월 15일자 주요일간지에는 탤런트 차인표 신애라 씨 부부가 생후 1개월된 여자 아기를 입양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기사의 주요한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14 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대한사회복지회에서 아기를 입양한 차, 신씨 부부는 “아이 이름은 ‘예수님의 은혜’라는 뜻으로 ‘예은’이라고 지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1995년에 결혼해 일곱 살 난 아들 정민군을 두었다. 신 씨는 ”큰일이 아닌데 주변에서 놀라는 분들이 많아 오히려 얼떨떨하다“고 말했다. 그는 “입양은 하나님이 아이를 주시는 다른 방법”이라면서 “배가 아파 낳은 아들 정민이와 가슴 아파 낳은 딸 예은이는 똑같이 소중한 자식”이라고 말했다. 신 씨는 “입양은 숨길 일이 아니라 반드시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렇게 해야 아이가 입양이 어두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 후 예은이의 근황을 밝힌 다른 기사에서는 예은이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어 수술을 받아야 된다고 하며, 차인표 신애라 부부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서 입양하였다고 한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입양에 관한 법의식 및 규정의 변천<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입 양을 왜 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입양에 관한 민법의 규정을 살펴보면 그 동안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1990년의 민법개정 전의 입양은 가(家)를 위한 입양 또는 부모를 위한 입양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양자를 위한 입양으로서의 특성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가 (家)를 위한 입양제도의 예로는 사후양자, 유언양자 및 서양자제도를 들 수 있는데, 사후양자(死後養子)는 양부가 될 호주가 사망한 후에 직계비속이 없으면 가를 계승하기 위하여 양자를 선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며, 유언양자(遺言養子)는 유언에 의하여 양자를 선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고, 서양자(壻養子)는 사위를 양자로 삼아 처가를 계승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입양제도는 입양의 일방당사자인 양자의 복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가의 계승 또는 양부모의 노후를 부양할 의무자를 두는 것에 의미를 가진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가 를 위한 양자인 사후양자와 유언양자 및 서양자에 관한 규정은 1990년의 민법개정으로 삭제되었지만 양자를 위한 양자제도는 한동안 마련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2005년의 민법개정에서는 친양자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비로소 양자를 위한 양자제도를 갖게 되었다. 2005년의 민법개정으로 도입된 친양자제도는 양자를 친자와 같이 취급하여 친부모와의 친족관계를 단절시키고, 양부모와의 관계만을 인정하는 제도이다(2008년부터 시행). 민법이 규정하는 일반양자의 경우 양친은 성년이어야 하고, 양자는 연장자가 아니어야 하며, 당사자 사이에 합의만 있으면 입양이 성립하는데 비하여, 친양자제도에 의하면 양친이 되고자 하는 자는 3년 이상 혼인중인 부부이어야 하며, 양자는 15세 미만이어야 한다. 그리고 친양자를 입양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가정법원이 친양자로 될 자의 복리를 위하여 양육상황, 친양자 입양의 동기, 양친의 양육능력 등을 고려하여 친양자 입양이 적당하지 아니하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입양을 허가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친양자로 입양되면 친양자는 부부의 혼인중 출생자로 간주되므로 양친의 성과 본을 따르게 된다. 또한 친부모와의 친족관계는 소멸하므로 혼인을 할 수 없는 친족의 범위에 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속 등의 법률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위 와는 달리 차, 신 씨 부부가 자녀를 입양한 대한사회복지회와 같은 보호기관에 보호중인 아동을 입양하는 경우에는 입양촉진 및 절차에 관한 특례법이 적용되는데, 보호기관에서 보호중인 아동들을 입양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양부모의 경제적 능력과 원만한 가정생활의 영위 등 양자를 양육하기 위한 요건을 갖추었는지 심사함으로써 양자의 복지를 고려하고 있다. 또한 특례법에 의하여 입양하는 경우에는 양친이 원하는 경우 양친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양친과 양자의 성(姓)이 다르다는 점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소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양자에 관한 종래의 관행<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근 자에 이르러서도 국내에서는 입양이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3년의 입양에 관한 통계에 따르면 국내입양은 1,564명이며, 해외입양은 2,287명이라고 한다. 또한 입양을 하는 경우에도 자녀를 입양한 사실을 숨기고자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입양과 관련한 법률문제 가운데 판결에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는, 자녀를 입양하면서 입양하였음을 숨기기 위하여 입양신고 대신 출생신고를 하였는데, 후일 상속 등의 문제로 말미암아 친생자관계를 부정하고자 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에 대하여 대법원은 「당사자가 양친자관계를 창설할 의사로 친생자출생신고를 하고 거기에 입양의 실질적 요건이 모두 구비되어 있다면 그 형식에 다소 잘못이 있더라도 입양의 효력이 발생하고, 양친자관계는 파양에 의하여 해소될 수 있는 점을 제외하고는 법률적으로 친생자관계와 똑같은 내용을 갖게 되므로 이 경우의 허위의 친생자출생신고는 법률상의 친자관계인 양친자관계를 공시하는 입양신고의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며, 이와 같은 경우 파양에 의하여 그 양친자관계를 해소할 필요가 있는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호적기재 자체를 말소하여 법률상 친자관계의 존재를 부인하게 하는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청구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입양을 하였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양자에 대한 입양신고를 하는 대신에 출생신고를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가를 위한 양자제도에서 양자를 위한 양자제도로<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민 법의 규정에 따라 일반양자를 둔 경우 양친과 양자 사이에 친족관계가 새로 생기지만, 친부모와 자녀 사이의 친족관계도 그대로 유지되며, 양자는 친부모의 성과 본을 따르게 된다. 가를 위한 양자의 경우, 친족 중에서 자녀 또는 손자녀의 항렬에 있는 자를 양자로 선정하였다면 양자와 양친의 성과 본이 동일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양자라는 사실 자체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입양신고 대신에 출생신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이 러한 법률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2005년의 개정민법에서는 친양자제도를 새로 둔 것과 더불어 자(子)의 성과 본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였다. 2008년부터 시행되는 이 제도에 따르면 자의 복리를 위하여 자의 성과 본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부, 모 또는 자의 청구에 의하여 법원의 허가를 받아 성을 변경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성을 변경하게 되면 양친과 양자의 성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P style="FONT-SIZE: 12pt; MARGIN: 0pt; COLOR: rgb(0,0,0); TEXT-INDENT: 0pt; LINE-HEIGHT: 18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1.4pt; COLOR: rgb(0,0,0); LINE-HEIGHT: 21.6pt;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t; TEXT-ALIGN: justify">세 계 10대 교역국이며, OECD 가입국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입양 보다는 해외입양이 더 많은 현실을 감안한다면, 개정민법에서 새로 도입한 친양자제도 등 입양에 관한 법제도의 변화를 계기로 하여 입양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도 변화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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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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